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정병윤
ㆍ작성일	2023-02-24 16:59

ㆍIP: 221.xxx.91

여름에 남겨진 신의 목소리

여름에 남겨진 신의 목소리

정병윤

8월 중순 자유로운 발걸음과 지칠 줄 모르는 여름, 주변 파도 소리와 이루는 앙상블은 이유를 몰라도 좋다. 일상의 억압에서 지치고 구멍이 난 마음을 뒤로하고 매월 한 번 속칭 ‘은사모(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의 회합이 있다. 그날은 1년 중 4번 있는 하기 야회 소풍 날이었다. 산과 바다가 어우러져 있는 야외 공간에 가족 동반이 가능한 모임이라 정회원은 23명이지만 야외 모임에 참석하는 인원이 70명이 넘을 때가 다반사라 이 모임의 회장인 내 처지에서는 흐뭇하고 배부른 풍경이다.
관혼상제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크고 작은 동정을 공유하며 성(氏)은 다르지만, 친형제처럼 마음을 나누는 내 안의 가장 소중한 모임이다. 아름답게 이루어진 관계이기 때문에 가족 중 해산물, 농산물, 과수원 관련 일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는 각각 바리바리 싸 들고 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여름 들판에 지천으로 핀 개망초의 향기와 하천에 흘러가는 맑은 물이 얼마나 맑은지 물고기들이 새 울음소리에 장단 맞춰 노니는 모습이 훤하게 보인다. 사색의 길이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는 시골길 따라가다 보면 냇가에 2,000평 남짓 넓은 초원에 회합의 장소를 열고 큰 생수통 쌓아놓고 인근 식당에서 그릇을 빌려 준비하기도 하고 더러는 각자 가져온 사람도 있다.
10시 반에 모여서 집행부는 손님 맞을 준비로 분주하고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녀 동반해서 오고 동부인(同夫人)할 수 있는 상황이면 같이 오고 특별한 일이 있는 한두 명을 제외하고 기존회원 22명 이하가 모인 적은 없다. 회비 중 일부는 자녀가 대학에 입학하거나 병원에 입원했을 때 더 나아가 우크라이나 같은 국가적 위기가 발생하면 외면하지 않고 선뜻 성금을 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 듯이 회비를 지출하는 과정에서도 이처럼 중대사가 있거나 특별한 애경사에 그 회비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들어내지 않지만 드러나 있고 짧은 하루이지만 천년의 이야기가 오가고 서로서로 고향을 느끼고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아름다운 관계이다. 이에 회의에 통과된 사항에 아무런 이견이 없다.
어릴 때부터 잘 지내거나 아버지이거나 형님이거나 동문이 아니었던가? 과거의 이야기와 선후배 같은 동시대에 살지는 않았으나 가슴과 가슴으로 소통되는 운명의 네트워크라 결속력이 단연 최고다.
회비는 정해진 액수대로 매달 총무 통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친척들이 받는 찬조의 손길 또한 성당의 바자회를 방불케 한다. 예를 들어 백합부터 전복, 조개, 회 등의 해산물 그리고 수박, 복숭아, 참외, 자두 등 과일과 자녀들의 학용품에서 생필품 등에 이르기까지 기부와 찬조를 한 친척들까지도 이날은 한마음으로 같이 논다.
이처럼 온갖 과일 해산물 농산물 공산품까지 마치 끓어 정이 넘친다. 마치 동화 속의 의좋은 형제의 달밤의 나라처럼 전세 낸 마차를 타고 서로 형님 먼저 아우 먼저의 모습으로 질서와 양보가 존재하는 가운데 환담을 지켜보는 과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자체만으로 흥미롭다.
그러던 중 친척 한 명이 어업에 종사해 보내준 아무 곳에서나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며 백합(白蛤) 껍질을 닦던 회원 부인께서 점심 요리 심부름 중인 나에게 “이것 좀 드세요. 바닷일 하는 동생이 보내왔는데 참 맛있습니다.” 하며 먹기를 권한다. 그래서 나는 “그게 뭡니까”라고 했더니 ‘백합’이라고 하면서 수저 위에 껍질을 깐 조갯살을 얹어서 손을 내밀었다. 쑥스러워서 어물쩍거리는데󰡐어서 드세요’하고 또 권하는 바람에 평소에 깨끗한 물병도 씻어 컵에 물을 따라 마시는 나이지만 이날은 다른 측면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아주머니의 정에 이끌려 엉겁결에 입으로 받아 먹어버렸다. 순간 매끄럽고 부드러우며 쫀득쫀득 씹히는 맛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상큼했으며 목 넘김이 최고였다.
점심을 먹은 지 3시간쯤 지나 속이 어지럽고 메스꺼우면서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에 힘이 슬슬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야외라서 간이 화장실에서 기다리는 줄이 만 리나 길어 보였고 아무래도 자주 들락거려야 할 계산을 하다 보니 회원들에게 심적 불편을 줄 것 같다는 생각에 총무에게 말을 하고 그 자리를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갑갑함이 밀어닥쳐 윗옷을 거실에 하나씩 벗어던지기 시작했고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화장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의식을 잃어가는 짧은 순간이지만 살아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는 있었는지 몸이 말을 듣지 않자 양쪽 팔을 모아서 볼을 깨물었다. 입안이 좀 따뜻해지면서 얼굴만 의식 돌아오더니 겨우 오랑우탄 스타일로 기어갈 수 있었다. 몽롱해지는 과정에서 저승사자의 그림자가 저 멀리 희미하게 오다가 물러가기를 반복하고 그 틈 사이로 선반 위에 보이는 보안장치 리모컨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다했지만, 손끝에서 머뭇거리기를 반복하다 짓먹던 힘을 다해 내 손가락에 닿아 누르자 안개 같은 의식 속으로 질주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모든 일들이 지워지고 나는 맥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보안요원이 집 안 구석구석을 찾다가 화장실에 쓰러져 있는 나와 변기에 빠져버린 리모컨을 찾아냈다. 즉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쓰러져있는 나에게 옷을 입혀 병원으로 데리고 가 생사를 넘나든 고투를 벌이는 동안 병실 안은 심장박동 효과음만이 정적을 깨우고 병원 창문 밖의 보라색 수국이 나를 지키고 있었다.
수액에 매달려 내 몸을 시간에 맡기고 모든 순간을 받아들인 날 동그란 치마에 아름다운 소녀가 까치발로 내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사경을 헤매다가 죽음마저 나를 피해 가고 3일 만에 간신히 의식을 찾았으며 19일 만에 드디어 유동식 연식 경식의 절차에 따라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응급실에서 깨어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첫 생각은 살아서 병원 문을 나간다면 함께 목놓아 흐느낄 수 있는 사랑과 사랑을 위해서만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하면서 가슴을 울렸다. 목으로 넘기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되겠다는 결심과 함께 그 후 1달 10일 만에 퇴원했다.
의사 선생님은 지금 우리 지역에 연일 계속되는 불볕더위로 해수면의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비브리오 패혈증 감염 때문에 사망자가 생기고 있고 당시 보안요원의 조치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다시는 눈을 뜰 수 없는 아찔한 상황이었다고 귀띔하시면서 익히지 않은 어패류 특히 백합은 절대로 날것으로 먹지 말라는 당부를 아끼지 않으셨다.
같이 갔던 회원들과 나에게 백합을 건네준 아주머니의 어찌할 바를 모르는 미안한 마음은 병문안으로 이어졌고 병문안에 지친 나는 병문안 금지를 당부하고 세상의 물체가 뚜렷이 보이는 일주일 후에는 1층에 준비된 월간지나 신문을 읽으면서 계획에 없는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살아서 숨소리를 공기와 마찰하는 지금도 여름이 되면 많은 사람에게 백합 식중독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습관이 생겼다. 더욱더 중요한 건 세상 사람들은 “백합 먹고 어떤 사람이 죽었구나” 하는 정도로 인생의 막을 내리는 것이지 “그 사람의 생애가 참 안됐구나”하고 생각해주는 사람은 나의 어머니를 제외하고는 신들 뿐이지 않을까?
사람이 길을 가다가 길을 잃는 경우가 있다고 하지만 꿈에 매달려 보지도 못하고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허무한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라는 코로나로 독감으로 신이 정해준 기침 소리로 시간을 메운다. 봄을 기다리는 복수초처럼 한밤의 햇살을 기다리며 오래 사랑하고 잊지 못할 목숨을 이어준 백합 한 알을 삼키고 얻는 값진 교훈이다. CCTV 비상 단추 신호를 받은 보안요원의 고마움을 담은 가슴으로 우주 안에 내 세상의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오늘을 달린다.

추분과 탱고

나의 삶 솔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