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정병윤
ㆍ작성일	2023-02-24 16:59

ㆍIP: 221.xxx.91

추분과 탱고

추분과 탱고

정병윤

오늘은 절기상 추분이다. 시절이 역병으로 수상하게 지나가더니 마스크를 벗어라 해도 벗지를 못한다. 살아가는 모습마저 굼벵이가 침 맞은 꼴이다. 어지간한 일로는 놀랄 것도 아니며 따갑고 아프더라도 그저 몸 보존이나 하며 근근이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시절이다. 내 목숨과 육신이 오늘 낮과 밤의 길이처럼 공평하게 살고 싶다.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손끝 아린 이들과는 탱고를 추지만, 이탈리아 치즈가 잔뜩 묻은 손들과는 이를테면 탱고를 추지 않는다.
세상과 죽어가는 모든 것에게 기꺼이 나를 내어주며 탄탄히 손잡아 함께 탱고를 추고 싶다. 참빗같이 촘촘한 여름 볕이 조석으로 무기력해지고 대낮에도 얼레빗 같은 엉성한 한 볕이 대나무에 매달려 지나가는 마른 바람에 머리칼을 말리고 있다. 가무에는 0점이지만, 듣고 보는 것에 대한 내 열의는 가히 100점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중에서 나는 슈베르트와 탱고를 좋아한다. 절제된 동작과 크게 표용하고 풀어주는 이중적인 춤, 나는 탱고를 좋아한다.
날카로운 오만의 스타카토 같은 숨결, 농밀한 질서, 섬세하고 우아한 하모니, 사심 없이 주고받는 품앗이 춤, 유쾌한 음악과 강한 비트로 스스로 물러가되 굴종하지 않고 교만하게 잡아당기되 독선 하지 않는다. 같은 빛깔과 무게의 숨결로 서로를 나누는 격정의 물레방아와 애감의 물갈퀴 같이 휘어져도 꺾이지 않는다. 어디 이뿐이랴? 위와 아래를 만들지 않으면서 이쪽과 저쪽을 따로 분류하지 않으며 흘러가는 묘미와 흐르고 난 뒤의 뿌듯함이 여운으로 남아 사심 없이 주고받는 눈높이의 여백이다.
탱고의 매력은 혼자서가 아니라 둘이서 하모니를 이루는 커플 무용이라는 점에 있다. 비록 얼핏 보면 독재성과 권위적인 선(線)을 이룬다 해도 탱고 그 안에는 광토(曠土)가 있고 그 광토 안에 삶과 사랑을 비롯하여 용서와 화합 그리고 양보와 질서로 힘의 분산이 내재되어 있다. 마치 시계의 두 바늘이 한 몸 되어 한줄기 강을 이루어 내듯이 활기찬 생명의 평정한 기세를 이루고 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손가락 끝에서 리듬이 흔들리면 스탭이 흐려지고 힘이 떨어지고 흐르는 빛이 약해져 디스코로 전락하고 만다. N극과 S극으로 만났다가 N극과 N극, S극과 S극으로 떨어지고 다시 S극과 N극으로 하나를 이루는 탱고는 시계의 초침처럼 순간순간 끊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기실은 초, 분, 시, 년으로 결국 원(圓)으로 영속된다. 물러나고 전진하는 동안 한순간도 방심하거나 줄이지 않는 지극정성인 춤은 탱고의 매력이다. 나선형을 그리며 찰나에 심는 춤 처음으로 시계 뚜껑을 열어본 감동이다.
담 너머에서 팬데믹으로 도미노 게임이나 하듯 사람들이 스르르 쓰러지고 죽어 넘어가는 한 구석에 분수가 치솟고 은비둘기들이 눈부시게 비상해야 할 광장에서 나를 숨기고 싶었다.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고 내가 헌 살쾡이 같았는데 아르헨티나의 권위 있는 스승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나는 탱고를 배울 수 있었다. 석 달 열흘을 하루 여섯 시간씩 배운 탱고는 이제 내가 만난 연인이 되어 밤마다 한 바탕씩 해금과 더불어 추분을 이룬다.
밑 빠진 독에 커피나 따른다든지 귀신 들린 휴대 전화기의 노예가 되지 말고 김남조의 시처럼 사랑을 남김없이 바치고서도 다 바치지 못함을 미안해하며 미련이나 집착 없이 생을 마감해야 할 것이다. 강물이 계곡 그립다고 돌아갈 수 없듯이 우리도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저 미래로 흘러가고 있다. 시간의 한 포자에 불과한 삶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라는 위로로 오늘이 지나간다. 추분에 함께하는 탱고는 부질없는 허전함으로 지나갈 것이다. 때 지난 허물을 망토로 걸치고 살거나, 두루마기로 입고 살거나 스카프로 두르고 살지 말고 벗어버려야 한다.
신은 일 년에 한 번씩 지구를 저울에 올려놓고 달아보시는 걸까? 그날이 바로 오늘 아닐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설사 잠시 치우쳤다 하더라도 이내 본디로 돌아가라 이르는 듯한 늙은 도공이 자신을 빚듯 시간으로 나를 빚고 싶다. 붉은 드레스는 가장 안전한 열정의 높낮이 또는 둘만의 장단으로 조용한 비명은 더욱 뜨겁다. 권위적 선의 너그러움과 내 목숨과 육신이 오늘 낮과 밤의 길이처럼 공평하게 살고 싶다.
이를테면 나랏돈이 제 쌈지에서 나온 것인 양 조자룡 헌 칼 쓰며 무상을 참정권과 엿 바꿔 주겠다며 울리불리를 내지르는 저잣거리의 난세에 문득 추분을 생각해낸 것은 사랑 부재로 가득한 이 시절과 이 시대를 탓해야 할 것이다. 참으로 거룩한 폭발이여 터지는 울음소리의 율동은 섬세한 배려, 물러나고 전진하는 아름다운 탱고의 하모니처럼 살자는 생각이다.
세상과 죽어가는 모든 것에게 기꺼이 나를 내어주며 탄탄히 손잡아 함께 화끈하게 뒤끝 없는 일체감으로 탱고를 추고 싶다. 오늘 마당의 샘에 빠진 하늘에 생겨난 바람이 달의 옷을 벗기고 있는 밤, 한 지붕 아래 사는 이들이 각자 피리를 불며 등을 돌리고 있다면 신을 창문을 닫으시고 등불까지 꺼버릴 것이다. 밤은 깊고 바람이 찰수록 서로 건네 잡은 손은 따뜻해야 할 것이다. 탱고를 추며 탱고처럼 서고 싶다. 새벽이 사라진 아침 탱고 뒤끝에 몸부림치는 거리에 차표 한 장 손에 쥐고 레테의 강으로 떠난다.

염경희 2023-02-27 16:40	존경하는 정병윤 작가님 우선 작가서재 개설하심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랜만에 서재를 들러보니 세 편의 수필이 눈에 들어와 감상하고 갑니다 좋은 글로 많은 사랑받으시길 바랍니다 건행하십시요.

황영칠 2023-03-05 08:50	존경하는 정병윤작가님 새 살림 차리신 것을 진심으로축하드립니다. 우선 2월 수필 작가님으로 등단 하심을 다시 한 번 축하 드립니다. 서울 지회 시인님께서 등단 하셨으니 더욱 기쁩니다 .저는 시인 마을에서 봄맞이 산책 나왔다가 작가님 서재에 들렀습니다. 자주 와서 응원하겠습니다.

장계숙 2023-03-21 09:51	정병윤 작가님~ 반갑습니다. 참으로 멋진 글입니다. 언어의 섬세함과 감성의 충만함에 한번 더 감상했습니다. 한번 뿐인 인생 정말 멋지게 살고싶어집니다. 세상이 어수선하여 시름이 깊어져도 넋놓고 앉아 한탄만 할 수 없으니 가장 멋진 모습으로 시간을 꾸려가는 것이 지나고 나도 후회없는 일이지요. 탱고에 대해 많은 생각과 의미.. 지식을 충전하게 되어 감사함이 가득 합니다. 좋은 작품 많이 집필하시어 자주 뵙길 기대합니다. 손끝 아린 이들과 탱고를~ 넘 멋지고 아름답네요.

이세복 2024-01-06 08:00	존경하는 정병윤 작가님 곱게 집필하신 글 모두 배 독합니다 작가로 좋은 글을 많이 집필하시길 응원합니다 두루두루 열공 하시는 모습을 칭찬하고 싶습니다 甲辰年 새해가 밝았습니다 멋진 꿈을 두루 이루시길 함께 두 손 모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름에 남겨진 신의 목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