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대한문인협회-수필

ㆍ작성자	조명래
ㆍ작성일	2023-06-27 14:53

ㆍIP: 183.xxx.251

그 여자의 시간

그 여자의 시간

조 명 래

그녀의 눈은 아직도 크고 깊었다.
눈언저리에 숨겨진 깊은 시름을 굳이 숨기려 하지 않는 그녀.
네 남매의 멍에를 두 어깨에 짊어진 채 앞서간 지아비를 원망한 지도 강산이 한번 하고도 반은 변한 세월이었다.
그녀는 잊고 있었다.
한 눈으로도 다 채울 수 있었던 그 골짜기와 산자락을 붙안은 그곳 오두막집에서 여윈 꿈 키워가던 그때 그 시절을.

산 그림자도 성급해 건너뛰던 그곳 깡촌 에서 버들처럼 휘청이는 허리로
찬새미 물 담아 이고 나오던 그 뽕밭 길과 붙박이 별 쳐다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너럭바위의 추억들도.
시천(矢川) 같이 흘러간 세월 속에 비켜 간 인연을 원망한 시간들.
너를 향한 내 마음이 한 조각인 줄 알았는데 조각조각 쌓인 그리움은 한이 되어 있었다.

굽이굽이 산 돌아 물도 돌아가던 곳.
초등학교 졸업을 하고 첫 동창회를 하던 날이었다.
아랫마을 동창 집에서 관리하는 제실(齋室)에서 하룻밤을 꼬박 뜬눈으로 새운 우리들은 이른 새벽에 헤어져서 풀잎에 이슬이 초롱초롱 매달린 오솔길을 걸어서 올라왔다.
윗동네에 사는 몇몇 친구들과는 삼거리에서 다시 헤어지고 드디어 숙이와 둘만의 시간이 주어졌다. 우리 동네 초입이 얼마 남지 않은 길목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며칠 동안 고민고민하며 계획한 행동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

다소곳이 내 뒤를 따라오는 숙이에게 강둑의 너럭바위를 가리키며 ”우리 저기 가서 이야기 좀 하자"라고 말했다.
깜짝 놀란 숙이가 토끼 눈을 하고 한걸음 물러서며 “거기 뭐 하러가? 왜 가자 하는데” 하고 되묻자 미처 뒷말을 생각해 두지 않았던 나는 당황하여 그만 말문이 막혔다. 당황함과 수치심으로 자존심이 망가진 나는 혼자 씩씩대며 앞서 걷는 내 뒤를 숙이가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면서 자꾸 말을 걸어왔지만 나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화만 냈었다.

숙이가 사는 곳은 산개울이 흐르는 야산 밑에 단 두 집이 살았는데 우리는 그곳을 독립 동이라 불렀다. 그중 한집은 내 친구 종철이네 집이었다. 종철이와 두 살 터울인 종철이 누나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던 숙이와는 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곳 독립 동은 우리 집에서 이백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친구 종철이 집에 놀러 가면 재수 좋은 날이면 숙이를 만날 수 있었기에 시간만 나면 친구 종철이 집에 자주 놀러 갔었다.
종철이 집에 가서 숙이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뒤꼍에 걸려있는 대형 가마솥에서 소죽을 퍼내고 난 뒤에 열기가 채시지 않은 가마솥에다 물을 데워 손발 때도 벗기고 아궁이에 남아있는 숯불에 고구마 감자 구워 먹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숙이와 나는 친구들 몰래 면 소재지로 가서 그 당시 하나밖에 없었던 사진관에서 둘이서 명함판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찾아와 아무도 모르게 작은방의 벽지를 칼로 찢어 그 속에 꼭꼭 숨겨놓았는데 흙벽에다 창호지로 붙여놓은 벽지가 떨어져 그만 사진이 방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당시 우리 집에 자주 놀려왔던 누나 친구들에게 들통이 나고 말았다. 누나들의 놀림에 부끄럽고 화가 나서 사진을 찢어서 오줌통에 버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후회가 된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다. 숙이는 그곳 고향에서 가사를 도우며 시집가기 전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고향에 올 때면 숙이 만날 생각에 가슴 설레었고, 찬새미에서 물동이를 이고 뽕밭을 돌아 나오는 숙이의 가녀린 허리는
참 매력적이었다. 타지에서 집에 다니러 왔던 나는 어렵게 숙이와 만날 약속을 했다. 그런데 그 약속을 한 날 어머니가 야지에 있는 고모 집 방문 일정을 잡는 바람에 첫 약속이 무산되고 말았다. 전화도 없던 그 시절 어머니 따라 고모 집 가면서 약속 장소에 나와 나를 기다렸을 숙이를 생각하며 만날 장소였던 강둑 너럭바위를 지나면서 애태웠던 기억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뒤 우리 집은 도시로 이사를 했고,
내가 군입대를 했을 때쯤 숙이는 부농의 장남에게 시집을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첫사랑의 숙이가 지금은 내 가까이에 산다.
사 남매를 잘 키워 독립시키고 경제적으로도 별 어려움 없이 잘 살던 숙이가 남편을 먼저 떠나보냈다. 혼자된 숙이의 아픔을 지켜보면서 나는 또 한 번의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아직도 조선시대 여자 같기만한 숙이는 좀처럼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숙이를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요즈음 나는 아내와 같이 가끔 숙이를 찾아가서 밥도 같이 먹고 지난 이야기도 하며 지낸다. 우리가 돌아올 때면 숙이는 친정어머니처럼 고추도 따주고 파도 뽑아주고 이것저것 챙겨준다. 이즈음은 나보다 아내가 숙이와 더 친해졌다. 숙이와 아내가 성씨가 같고 내가 숙이 이야기를 아내에게 가끔 해서인지 아내는 처음부터 거부감 없이 숙이를 대했다.
처음에는 수줍어만 하던 숙이도 아내에게 전화도 가끔씩 하면서 자매처럼 잘 지내고 있다.

장계숙 2023-07-23 16:27	인연이 깊어 돌고 돌아서 결국 함께 이어가는 인연~ 사람 사는 세상이 따스하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아내분의 친절도 참 멋지네요. 그간의 삶의 이력을 생각하면 왠지 가슴 아리기도 하겠지만 진정한 친구 관계의 소중함을 발견하게 되네요. 그 여자의 시간... 즐겁게 감상했습니다.

조명래 2023-07-25 15:25	방문해 주심에 감사한 마음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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